인쇄 기사스크랩 [제921호]2016-01-08 11:03

[신년 르포] ‘쉴 시간을 달라’
“팀장님, 20분만 자고 말짱한 정신으로 일할게요.”
직장인 10명 중 9명 ‘시에스타’ 도입 찬성
‘밥’보다 ‘잠’ 택하는 직장인 늘어
 
 하루를 시작하라는 시끌벅적한 알람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주어진 출근준비 시간은 30분. 시간 내에 씻고 가방을 챙기고 옷을 입고 부랴부랴 현관문을 나섰다. 사람들로 가득찬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2차 출근준비가 시작된다.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화장하기.

이제는 남의 시선 따윈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레벨까지 왔다. 화장까지 출근준비를 완벽하게 끝내고나면 힘이 쭉 빠진다. 퇴근하는 기분이다. 그러고 몇 분 모르는 이의 등에 기대 연신 하품을 하다보면 내릴 시간이다.

자리에 앉아서도 하품은 멈출 줄 모른다. 어제 안 자고 뭐했냐는 상사의 농담 섞인 핀잔에 정신을 차리려 커피를 마시며 업무를 시작한다. 하품 한 번, 모니터 한 번, 물어보는 소비자와 상담 한 번,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오늘은 밥 대신 쏟아지는 졸음에 항복했다.

오후 업무를 위해 밥 대신 잠을 택하기로 하고 인근 카페로 발을 향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단잠에 빠지려는데 “어머, ●●씨”라며 누군가 내 등을 두드린다. 짜증 섞인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웬걸. 상사의 등장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밥도 포기하고 선택한 낮잠마저 놓쳐 짜증은 극에 달했다. <직장인 A씨의 하루>
글·사진=권초롱 기자 titnews@chol.com
 

여행사들이 밀집된 무교동의 점심시간.
 
 
“수면부족 직장인 매일 졸음과 씨름하다”
직장인 A씨를 비롯한 대한민국 직장인 다수는 수면부족으로 업무 중 찾아오는 불청객 ‘졸음’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특히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오후 업무부터는 그야말로 졸음과의 보이지 않는 씨름이 사무실 전체에서 펼쳐진다. 하품을 20번은 넘게 해대는 A씨나 카페인 중독자라 불리는 B대리, 오후시간대 더 자주 담배를 피러 나가는 C부장 등 직위여하를 불문하고 말이다.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 2,017명을 대상으로 ‘근무시간에 졸음을 느낀 적이 있는가’란 설문조사 한 결과 응답자 97.3%가 ‘그렇다’고 답했다. 졸음이 밀려오는 시간으로는 오후 2~3시가 49.7%로 가장 많았다. 오후 1시~2시가 27.0%, 오후 3~4시가 12.8%로 뒤를 이었다.

그렇다면 직장인들이 업무 도중 쏟아지는 졸음을 달래기 위해 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잡코리아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0.3%는 ‘커피 등 각성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음료를 마시는’ 것으로 조사됐다. 잠깐 휴식시간을 갖는 응답자는 30.9%였으며 정신력으로 버티거나(19.0%) 몰래 쪽잠을 자는(15.2%) 직장인도 있었다. 이밖에 담배를 피우거나(14.7%) 산책, 스트레칭 등으로 몸을 풀기도(13.4%) 하고 세수(5.5%)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졸음을 쫒기 위해 커피를 마시거나 자투리 시간 산책하는 직장인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졸음과의 전쟁이 힘겨운 직장인들은 ‘시에스타(siesta)’ 도입을 적극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인 2,017명 중 90.1%가 현재 근무하는 회사에서 시에스타를 도입한다면 찬성한다고 답했다. 시에스타를 찬성하는 이유로는 ‘업무 집중도가 높아질 것 같아서’라는 의견이 39.0%로 가장 많았다.

이어 업무 능률 향상(34.1%), 피로회복(15.4%)을 이유로 꼽았으며 졸음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응답도 8.3% 차지했다. (시에스타는 이른 오후에 자는 낮잠을 뜻한다. 이탈리아, 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 국가 및 라틴아메리카의 낮잠 풍습으로 이들 문화권은 직장에서도 공식적으로 낮잠을 허용하고 있다.)
 
□□여행사 사원
“집에서 회사까지 1시간이 넘어요. 버스에 올라 탄 순간부터 피곤해지죠. 좌석에 앉은 날은 그나마 컨디션이 괜찮은데 서서 출근하는 날은 회사에 앉으면 바로 곯아떨어질 것처럼 온 몸이 천근만근이에요.

하루는 점심식사를 하면 오후에 더 졸릴 것 같아서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휴게실에 갔어요. 눈 좀 붙이려고 들어갔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대리님 두 명이 들어오는 거예요.

같이 쉬기도 불편할 것 같고 결국은 다시 나와서 제 책상에 앉았죠. 점심시간이라고 울리는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잖아요. 결국 점심시간까지 일하게 됐어요. 그 후로는 절대 점심시간에 자리에 있지 않아요. 회사 사람들 잘 안 오는 카페를 가죠.”

 

“피곤한 대한민국, 피로산업이 뜬다”
입 찢어질 듯 쩍쩍 해대는 하품으로 피로를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면서 국내에서도 ‘시에스타’ 제도를 도입하는 기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이다스 아이티(소프트웨어 개발업체)는 낮잠시간을 지정해 직원들의 낮잠을 권장하고 있다. 동 기업은 점심식사 시간인 오후 12시부터 1시 10분까지 식사를 마치고 나면 전 직원이 낮잠을 잘 수 있도록 사무실 조명을 어둡게 한다. 더욱 놀라운 건 직원들이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게 아니라 편히 누워 잘 수 있도록 직원들의 의자를 완전히 뒤로 젖혀지는 것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마이다스 아이티 측은 ‘시에스타’ 도입으로 기존대비 약 2배(매출향샹이 낮잠효과에만 기인한다곤 할 수 없으나)가량 매출이 향상됐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8월부터 ‘시에스타’를 도입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직원 중 임산부나 야근자에 한해 하루 1시간까지 낮잠을 허용하는 것. 다만 자는 시간만큼 업무시간이 늘어난다. 만약 오후 2시에 50분간 낮잠을 잤다면 퇴근 시간은 6시 50분인 셈이다.

서울시의 ‘시에스타’ 도입을 놓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피로한 대한민국 다수의 직장인(특히 여행업 종사자들)에게는 꿈같은 얘기다. ‘점심식사’ 대신 ‘낮잠’을 택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지만 ‘눈 붙일 곳’ 하나 변변치 않다는 점이 씁쓸하다.

이들을 타깃으로 한 피로산업이 최근 각광받고 있다. 종로, 여의도, 역삼 등 직장인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낮잠카페’, ‘안마카페’ 등이 생겨나고 있다. 병원에선 일명 ‘직장인주사’가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을 정도다. 이밖에도 편안한 낮잠을 위한 이색 낮잠도구들을 판매하는 업체도 늘고 있다. 낮잠 스카프나 꺼내서 펼친 뒤 얼굴을 대면 목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는 도구 등 다채로운 아이디어상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직장인들.
 
 
○○여행사 과장
“여행사 생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나요? 주 5일 중 3일은 야근이에요. 야근이 끝나면 회식도 하죠. 홈쇼핑이라도 하게 되면 일주일이 뭐예요, 2~3주는 불철주야죠. 연말에는 망년회(송년회)다 뭐다 행사도 많아요. 관광청, 항공사, 회사 팀 회식, 회사 전체 회식 등등. 피곤한데 하루가 멀다 하고 술까지 들이부으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버거워요. 요즘 점심이요? 병원 가서 수액 한 대 맞고 꿀잠자고 일어나서 오후 업무하죠. 그리고 또 마시는 거죠.”

 

“20분만 낮잠에 투자해도 업무효율성 증대”
낮잠이 업무(학업)효율성을 높여준다는 연구결과들은 줄곧 이어져 왔다. 수면의학회는 직장인들의 수면부족은 기업에 연간 1인당 711시간 31분, 연평균 1,568만 4,365원에 달하는 손실을 안겨준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2001년 미국에서는 수면 부족으로 매년 180억 달러 규모의 생산성 손실이 초래되고 있다는 놀랄만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지난해 3월 독일 자를란트대학 연구팀은 하루 45분 정도의 낮잠이 기억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됨을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해당 대학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90개의 단어와 한 쌍으로 된 120개의 단어를 주고 스스로 학습하도록 했다. 이후 DVD를 보는 그룹과 잠을 재운 그룹으로 나눠 단어 기억력 테스트를 했다. 결과는 잠을 잔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더 많은 단어들을 기억했다.

연구팀은 “실험결과 45~60분의 낮잠은 기억력 향상에 5배나 더 도움이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학교나 직장에서 잠깐 낮잠을 자게 되면 학습이나 업무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로버트 스틱 골드 하버드대 수면연구원은 기업이 ‘전략적인 낮잠’을 적극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낮잠은 아주 효과적인 문제 해결자다. 현대사회에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느냐보다 적은 시간대비 높은 업무처리, 즉 능률적으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낮잠은 직원의 능률을 높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미 많은 연구결과가 이렇듯 ‘낮잠효과’를 증명했다. 낮잠효과는 집중력과 기억력을 높이며 체력을 증진시킬 뿐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 효과까지 있는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그렇다면 낮잠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앞선 설문조사 결과처럼 다수의 직장인은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시거나 쪽잠을 잔다. 흥미롭게도 이어진 연구는 커피와 잠 중 양자택일이 아니라 커피를 마신 후 낮잠을 자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결과를 내놨다.

영국 러프버러대 연구진은 참가자를 세 그룹으로 나눴다. A그룹은 커피만 마시고 B그룹은 낮잠만 자고 C그룹은 커피를 마신 후 15분간 자게 했다. 이후 참가자들에게 모의주행을 시켰더니 A,B 그룹보다 C그룹이 월등한 성적을 보였다. ‘커피낮잠(coffee nap, 커피를 빨리 마신 후 바로 낮잠을 자는 효과)’ 효과다. 카페인이 체내에 들어가 효과를 발휘하는 시간이 대략 20분으로 커피낮잠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선 20분 수면이 알맞다고 한다.
 
△△항공사 영업팀 대리
“영업팀은 내근이 많은 콜센터팀이나 경영지원, 인사팀보다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요. 그래서 너무 졸리다 싶으면 점심시간이 아니더라도 카페에서 쪽잠을 자요.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과거에는 사우나를 주로 갔다는데 요즘 사우나 보기 힘들잖아요. 카페도 가고 PC방도 종종 가죠. 여행사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사람 만나 영업하다보면 휴대폰 배터리 방전된 것처럼 힘이 쭉 빠져요. 낮잠은 급속충전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