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기사스크랩 [제977호]2017-03-23 13:53

현지취재-일본 규슈 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Let’s 오르레, 사람과 자연이 함께 걷다
 
 
산타고 해안가를 훔치다 고운 흙길까지, 지루할 틈 없어

한일 민간 관광 교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올레꾼 급증

방문객 위한 무료 쉼터 열고 현지인들은 틈틈이 한국어 공부
 
 
자연이 만든 길에 사람이 잠시 몸을 맡긴다고 했다. 흔적을 남기지 말 되 길과 자연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도 했다. 걷기 좋은 길인만큼 스스럼없이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이상하게도 발은 느린데 머리는 빨라져 생각이 꼬리를 무는 점은 신기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들과 길을 걸었다. 산인가 싶으면 금세 밭이 나타나 싱그러운 작물을 카메라에 담아야 했고 조금 힘들어 몸에 힘을 빼면 제주도와 닮은 바다와 검은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봄이 와서 걸은 것은 아니었다. 걷는 순간 발끝에 봄이 채였고 걷고 나니 봄이 열렸다.
취재협조 및 문의=나가사키현 시마바라반도 관광연맹(0957-62-0655)/
규슈관광추진기구( http://www.welcomekyushu.or.kr)/재팬라인(02-6242-9191)
미나미 시마바라=글·사진 김문주 기자 titnews@chol.com
 
 

 
▲핑크빛 올레, 여행자를 이끌다
 
2월의 마지막 주말, 미나미 시마바라 소재 구치노츠항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였다. 초봄을 앞두고 올레길 홍보 및 판촉을 위해‘핑크빛 올레 걷기’이벤트가 열린 탓이다. 걷기 이벤트에 참가한 기자 및 일행들은 제 17코스인 나가사키현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를 함께 걸었다. 코스의 전체 길이는 10.5km로 난이도는 중. 성인 기준 3시간에서 늦어도 4시간 안에는 넉넉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출발 전 가벼운 운동은 필수.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출발선에 서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유쾌한 것도 하나같이 재밌었다.

바람이 시원하고 햇살은 꼭 그만큼 따뜻해 걷기 좋은 날이라는 일행들의 칭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0대의 동성 친구, 20대의 사이좋은 연인, 3040 부부, 50대 이상의 어머니들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까지……. 여기에 고작 세 걸음만 걸어도 힘이 부치는 듯 뒤를 돌아보며 엄마를 찾는 어린 아이도 곳곳에서 보였다. 핑크색 의상과 소품으로 멋을 부리고 지도를 확인하는 모습들도 퍽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오로지 ‘걷는다’는 동일한 목표 아래 저마다의 가방과 깃발을 들고 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점은 신기하고 또 신기했다.
 

규슈올레가 제주올레의 자매품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규슈관광추진기구가 온천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 단체 여행 패턴을 다변화하고자 사단법인 제주올레(이사장 서명숙)측에 직접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이 벌써 5년 전 일이다. 초기 4개 코스로 문을 열었던 규슈올레는 끊임없는 성장을 거듭해 계속 길을 만들고 어느 덧 규슈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됐다. 제주올레가 전 국민의 도보여행을 촉진한 것처럼 규슈올레 또한 규슈를 찾는 여행객들의 선택 폭을 넓히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산, 소나무, 양파 밭, 바다, 오래된 등대까지
 

미나미 시마바라는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지명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규슈 안에서도 나가사키, 후쿠오카 등을 방문하는 여행자는 많지만 후쿠오카에서도 차량으로 두 시간 이상이 걸리는 이 지역까지 손수 찾아오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규슈 올레가 성장하고 유명세를 타면서 올레길 완주를 계획하는 여행자들이 많아졌고 덩달아 미나미 시마바라 역시 탄탄한 인지도를 쌓고 있다.

“자연이 만들었지만 사람이 만든 길을 우리가 걷고 있어요. 게다가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는 정말 좋은 길이예요. 길 안에 다양한 관광지의 모습이 보이거든요. 일본인가 싶다가 프로방스 같기도 하고 캄보디아를 연상시키는 나무 군락도 있어요. (웃음)”
 

맨 처음 규슈 올레를 기획하고 실천했던 규슈관광추진기구 이유미 씨의 말이다. 그의 소개처럼 17코스의 장점은 좀처럼 지루함을 주지 않는다는 것. 직선으로 된 길을 한 방향으로 오랜 시간 걷는 것은 아무리 좋은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재미가 없다. 그러나 17코스는 곳곳에 다양한 풍경이 스며들어 있고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탓에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체력이 약한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즐겁게 움직일 수 있다.

규슈는 일본의 역사에서 흔치 않은 교류와 무역의 장소로 서양의 문물을 제일 먼저 받아들이며 외세와 교류했던 지역이다. 개방적인 풍토 탓에 문화와 예술 또한 다양하다. 17코스의 시작점인 구치노츠항이 바로 그러한 역사의 일부로써 전성기에는 수많은 유럽의 무역선들이 항구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코스의 마지막인 구치노츠 역사 민속자료관을 방문한다면 구치노츠의 번영기와 쇠락기에 대한 설명은 물론 당시 지역민들의 일상까지 들을 수 있다. 규모는 작지만 스토리텔링이 상당히 잘돼 있다.)
 

구치노츠항을 지나 20분 정도를 걷다 보면 바로 야쿠모 신사가 나오는데 신사에는 상상의 동물인 갓파상이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풍만한 가슴을 지닌 다소 요상한 어린 요괴의 모습으로 지금은 길을 오가며 다산을 기원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신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국이나 일본이나 유한한 삶에서 원하는 것을 위해 무한한 신을 섬기는 문화는 꼭 닮아있다.

갓파상을 지나 20분 정도 어두운 숲과 오르막길을 걷자 슬슬 사람들에게서 땀 냄새가 난다. 힘들다며 엄마에게 칭얼대는 아이들도 보이고 남자들은 겉옷을 벗거나 모자를 고쳐 쓰기도 한다. 이때부터는 함께 출발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속도에 따라 상위권, 하위권으로 그룹이 생기기 시작한다. 도보여행은 빨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지만, 덕이 부족한지 은근히 뒤처지는 것이 무서웠다.
 

주변 풍경과 함께 걷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뛰려 했을지도 모른다.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마음을 다스린 다음, 묵묵히 제 속도를 따라 걷다보니 눈앞에 제주의 오름과 같은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난다. 바로 노다제방-노로시야마산. 16세기 후반 노다 신자에몽의 제안으로 빗물을 저장해 축조한 인공저수지로써 주변에 위치한 대파, 양파, 감자밭들을 지나 굽이굽이 산을 오르는 올레꾼들의 모습이 장관이다. 일찍 수확해 박스에 가득 차있는 양파나 대파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부담을 버린 탓인지 풀 한포기도 정답게만 느껴진다. 꼬박 15분을 더 걸어 노로시야만 정상에 오르면 푸른 바다와 바다 건너 아마쿠사의 전경까지 한 번에 이어진다. 이 곳에는 원래 오래된 소나무가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벌레의 피해로 나무가 없어졌다고. 대신 그 자리에는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의자와 벚꽃나무가 명맥을 지키고 있었다. 3월 중순 들어 벚꽃이 피면 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으로 변할지는 상상에 맡기고 싶다.

산을 내려와 바다를 옆에 두고 걷다보면 세즈메자키 등대를 만난다. 이 지역은 전국적으로 조류가 빠른 지역인데 등대 밑에는 웅장한 바다 소용돌이를 볼 수 있다. 혹자는 명량대첩이 일어난 진도의 울돌목과 닮아있다고 했다. (다만 곶의 끝자락에 위치한 흰 색의 등대를 보기 위해 건너는 나무다리가 다소 오래되고 실제로 중간 중간 끊어져 있는 탓에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라면 건너지 말 것을 권한다.)

등대까지 보고 나면 코스의 절반 이상을 걸은 셈이다. 물로 목을 축이고 신발 끈을 묶고 다시 바닷길을 따라 평지를 걷는다. 무릎이 조금 당긴다는 느낌을 받을 때 곧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연상시키는 굵고 진한 용나무 군락을 만나게 된다. 20그루 정도가 마을 입구를 에워싸고 있는데 멀리서 보면 일본이 아니라 실제로 태국이나 캄보디아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부근에는 부부가 함께 커피를 파는 작은 상점이 있는데 잠시 들러서 커피 한 잔을 맛보고 질 좋은 원두를 사는 것도 올레길을 걷는 예의이자 좋은 팁이다.
 

코스도 거의 막바지. 제주 현무암을 연상시키는 검은 바위와 바닷길이 이어지는 해안입구를 다시 30분을 걷다가 과거 항구에 출입하는 배들의 안전항해를 지켜주는 등대로 활약했던 구치노츠 등대를 지나 붉은 색상이 강렬한 남만 다리 밑에 위치한 구치노츠 민속자료관에 도착하면 어느 덧 4시간의 소풍이 가뿐히 끝나있다.

 
▲방문객 위해 자신의 보금자리를 내주는 사람들

‘올레’라는 명칭 뿐 아니라 운영 방침과 철학 역시 고스란히 제주올레를 닮아있는 규슈올레는 길을 내는 과정에서 인공적인 과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친환경 원칙을 지키며 대형 관광지보다는 마을과 작은 상점 등을 방문객들이 지나게 해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고 지역 경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초기 4개 코스로 시작했던 규슈 올레는 지난 2월 18일과 19일, 18번째 코스인 가고시마현 이즈미 코스와 19번째 코스인 후쿠오카현 미야마기요미즈야마 코스를 선보이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여행 지형이 달라지고 방문객들의 관심도 높아지면서 규슈 올레를 찾는 여행자들 또한 꾸준히 성장하는 추세다. 초반에는 한국여행자나 등산객 비중이 높았지만 이후 도보 여행에 매료된 일본 현지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한일 양국에서 방문객이 늘어나고 있다. 규슈관광추진기구에 따르면 2012년 2월부터 2016년 3월까지 규슈올레 방문자는 총 22만3천620명이며 이 가운데 한국인이 63.3%(14만 1천500명), 일본인은 36.7%(8만 2천 120명)로 파악된다.
 

고백하건대 17코스의 여러 가지 풍광 중 기자에게 가장 뚜렷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 방문객들을 위한 무료 쉼터. 길 중간에 간이 화장실이 거의 없는 편인데 주민들이 방문객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고 편의와 다양한 여행정보센터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특히 70살이 넘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미나미 시마바라의 구의원은 서툴지만 그만큼 정감 있는 한국어로 불편함이 없는지 말을 건넸다. 노트에 빼곡히 게재돼 있는 한국어가 울컥했다. 길을 마치는 동시에 빗장을 열고 스스럼없이 다른 세계에 문을 열었던 그들의 과거가 오늘날의 올레길로 이어지고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자연과 사람이 함께 걷는 길이다.
 
 
 
●소요 시간 : 성인 기준 약 3~4시간.
●거리 : 10.5km
●코스 : 구치노츠항-야쿠모신사-풍유갓파상-노다제방-노로시야마산-환상의노무키 소나무-다지리 해안-세즈메자키 등대-용나무군락-현무암 해안입구-구치노츠 등대-구치노츠 역사 민족 자료관
 

 
한국의 대표적인 도보여행자 길 ‘제주올레’ 브랜드가 규슈로 수출돼 만들어진 트레킹 코스로 지난 2012년 2월 처음 4개 코스(사가현 다케오,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이와지마, 오이타현 오쿠분고, 가고시마현 이부스키-가이몬)가 열렸다. 한국에서는 도보 여행 혹은 트레킹 코스라는 일반명사로 인식되고 있는 제주어 ‘올레’를 그대로 사용하며 코스개발자문 및 길 표식 디자인을 (사)제주올레가 제공했다. 현재까지 규슈 올레는 19개 코스, 총 222.5킬로까지 길이 만들어졌다. 규슈관광추진기구는 앞으로도 매년 2~4개 코스를 개장해 총 30개까지 코스를 늘린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