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기사스크랩 [제752호]2012-04-30 17:23

스리랑카(1) 동양의 진주 스리랑카

불교성지 순례의 최고 목적지

연간 8천명 내외 한국 관광객 방문

스리랑카는 국내여행 시장에 친숙한 목적지는 아니지만, 최근 차별화된 여행을 선호하는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관심을 끌고 있다.

불교사원을 구경하거나 가족과 함께 교육+문화 여행을 즐기기에도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다채로운 테마와 이국적인 매력이 가득한 스리랑카로 떠나보자.

취재협조 및 문의=싱가포르항공 http://www.singaporeair.com/kr

스리랑카=남기수 기자 titnews@chol.com

동굴 사원으로는 가장 잘 보존된 담불라의 황금사원

시기리야에서 약 18Km 떨어진 담불라 황금 사원은 담불라 바위산 중턱에 있는 석굴사원이다. 22세기 동안 내려온 신성한 불교 순례지이며 동굴 사원으로는 가장 잘 보존되고 있다. BC 1세기 무렵 신할라왕조 제19대왕 와타가마니 아바야가 건설했다.

암벽 밑의 흰색 벽으로 이루어진 회랑 안쪽에 자연암을 파낸 석굴 5개가 줄지어 있다. 석굴 안에는 황금색 불상과 신상 160여 개가 안치되어 있고, 천장과 벽에는 화려한 빛깔의 벽화가 빽빽이 그려져 있다.

담불라 사원에 들어 갈 때는 모자와 신발은 벗어야 된다. 이는 스리랑카에서 불교 사원에 들어가는 최소한의 예의다. 양말은 관계가 없다. 신발은 사원 입구에 맡겨 둔다. 동굴에는 촬영이 허락되는 곳이 있으나 불상을 배경으로 한 촬영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이는 부처님과 사람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불법에 따른 것이다.

석굴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제2굴인 마하라자 비하라(위대한 왕의 사원)이다. 정면의 너비 약 52m, 안쪽 길이 약 23m, 입구 부분의 높이 약 7m이고 조각상 61개가 안치되어 있다. 굴 내부는 본당·홀·회랑의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입구가 있다.

서쪽 입구로 들어가면 본존인 불타의 입상이 나타·마이트레야 등의 4신을 거느리고 있다. 천장에는 불타의 생애를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동쪽 입구로 들어가면 정면과 오른쪽에 불타의 좌상과 입상 수십 개가 있고, 천장에는 같은 모습을 한 1,000여 개의 불타가 그려져 있다.

이밖에 제1굴에는 열반에 드는 불타, 제3굴에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제4굴에는 2,000년 전에 보석을 넣었다는 불탑이 보관되어 있고 제5굴에는 조각상과 20세기 초에 그린 벽화가 있다. 담불라 사원은 불교성지순례의 필수 방문 사원으로 외국인이 많이 방문한다. 1991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됐다.

실론티가 나라 이름보다 더 알려진 나라

인도 남부 인도양에 눈물방울처럼 떠 있는 섬, 한국의 3분의 2 국토 면적에 인구 2천만 명, 국민소득 2,500달러 내외, 이제 최빈국은 면한 국가 경제다.

스리랑카 이전의 국명은 실론이다. 기원전 3세기에 불교를 받아 드렸고 국민 69%가 불교도다. 그 외 15%가 힌두교, 크리스천 7%, 이슬람이 7%다. 스리랑카의 불교신앙의 의미는 불교국으로서의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시켜 주는 종교적 가치와 도덕을 지키는 영혼이다. 300년 동안 긴 외침과 내전을 겪은 나라로, 2004년엔 자연 재앙인 쓰나미로 사망 3만 1,000명, 실종 6천 300명, 재산피해 15만 달러나 됐다. 우리에겐 스리랑카 보다 실론이 더 귀에 익어 있다. 실론에서 생산되는 차가 유명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의 특이한 것은 국민 남녀비율이 48:52로 여자가 더 많다. 그래서 결혼 못한 여인들도 더러는 있다. 한국과는 1977년에 대사를 교환했고 1978년에 양국 항공협정이 체결됐으며 양자 교역량은 3억 달러, 스리랑카인이 1만 명 이상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보석, 고무, 섬유, 차가 주 생산품이며 불교유적, 비치, 해양스포츠, 환경투어 등이 관광자원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이 7개나 된다. 한국에서는 연간 8,000명 내외의 한국관광객이 다녀가지만 그중 대부분은 불교성지순례자로 일반관광은 아직 생소한 느낌이다.

2012 콜롬보에서 개최된 엑스포에 참가 차 방문한 김에 관광지 몇 곳을 찾았다.

스리랑카를 움직이는 수도 콜롬보(Colombo)

콜롬보는 스리랑카의 수도이며 제일 큰 도시다. 약간의 흥분과 조금은 광적인 도시로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이는 오랜 세월 축척된 항구도시로서 정서다.

콜롬보가 다른 곳보다 관광적인 매력은 부족할지 모르나 그래도 스리랑카를 움직이는 힘 있는 다채로운 공간이다. 시내 북쪽은 항구이며 백화점, 항공사, 관공서, 서점, 사무실 등이 모여 있는 비즈니스 지역이다. 또 시계탑, 과거의 등대, 전통주의자들에겐 여왕의 저택으로 알려진 대통령 궁 등의 빼어난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난 시간 제국의 분위기를 물신 풍긴다. 남쪽으로 가면 해안가에 넓게 퍼진 잔디 위에 크리켓 경기를 하는 사람, 연인과의 만나는 장소 같은 휴식을 위한 공간 갈레 페이스 그린(Galle Face Green)이 있다. 바다를 보며 여러 사람들과 접 할 수 있는 휴식공간이라 해도 좋다.

가족과 함께한 여행이라면 찾아 볼만한 곳이다. 조금 더 남쪽으로 가면 멋있는 맨션과 오래된 고목들이 들어선 시나몬 가든(Cinnamon Gardens)이 나온다. 이곳은 콜롬보에서 가장 세련된 공원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이동하면 과일, 채소, 고기, 보석, 금, 은, 양철 고물, 역사적 작품들이 소장된 국립 박물관, 미술관, 불교, 힌두교, 이슬람 사원이 있는 페타 파자르(Pettah Bazaar) 지역이 나온다. 페타 파자르 지역은 스리랑카의 종교, 문화, 음식 등 스리랑카 역사와 삶이 있어 이곳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문화적인 면을 충분히 감상했다면 데히왈라(Dehiwala) 동물원으로 발길을 돌려 보는 것도 좋다.

데히왈라 동물원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오후에 열리는 코끼리 쇼다. 많은 관광객이 코끼리 쇼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저렴한 숙박과 식사, 쇼핑거리가 있는 포트(Port)와 페타(Pettah)지역은 개별여행객(FIT)들이 주로 찾는 지역이다. 점점 나이트 라이프가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런대로 즐길거리가 많은 곳이다.

[스리랑카 여행시 주의 할 점]

▲교통 : 카토나야케 국제공항(콜롬보 공항)에서 콜롬보 시내까지 거리는 34km. 교통수단은 기차, 버스, 택시, 삼륜택시(Bajaj)가 있다. 기차는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이용하기가 어렵다. 현지 일반 시민용 버스는 노후화되고 만원이어서 외국인들이 이용하기엔 불편하다. 택시는 콜이고 미터기가 부착되어 있으나 삼륜택시는 바가지 요금 때문에 미리 흥정하는 것이 좋다.

▲쇼핑 : 스리랑카는 보석종류가 유명하다. 보석류를 쇼핑 할 때는 영수증을 필히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교환이 가능하다.

▲치안 : 공항, 호텔, 관광명소 등에 잡범이 많다. 여권과 귀중품은 보관에 주의해야 한다. 또 공중전화가 없어 외진 곳에 혼자 다니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

▲기타 : 사원에 들어 갈 때는 모자와 신발을 벗어야 한다. 또 허락 없이 촬영은 금한다. 또 상하수도 시설이 좋지 않아 수돗물을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 미네랄 워터나 끓인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


아라비아인들의 교역지 ‘갈레(Galle) ’

콜롬보로부터 갈레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이 걸린다. 거리는 160Km 정도지만 2차선도로와 낡은 버스, 거의 파괴된 교통질서 때문에 자동차의 속도는 고작 50km/h 내외다. 갈레요새를 얼마 앞두고 바다를 앞에 둔 호텔 ‘라이트 하우스’가 있다. 이름대로 등대가 있었을 법한 높은 암반위에 선 건물로 2층에 순 스리랑카 식 뷔페 레스토랑이 있다. 입구에서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계단부터 바다와 배, 선원 같은 조각들이 즐비하다. 바다를 연상케 하는 조각들이다.

레스토랑에 들어서면 바다가 발밑에 있는 듯 인도양의 싱그런 해풍이 온 몸을 식혀 준다. 이 레스토랑에는 음식을 담아 놓은 그릇부터 흙으로 구운 거친 질그릇이다. 거기에다 해산물 카레. 치킨카레, 콩 요리 카레, 안남미 밥 카레 등. 대부분의 음식이 이곳 토속음식 카레 요리다. 음식향도 이곳 특유 향인 매콤함이 있어 우리 입맛에는 별로다. 이곳 사람들이 카레를 주식으로 하는 것은 그 원료가 야자열매이기 때문이란다.

야자열매에는 전분이 많아 날아 갈 것 같은 안남미 밥에 카레를 섞어 손으로 뭉치면 찰진 기운이 생겨 잘 뭉쳐진단다. 또 야자는 열대 과일 중 생산량도 많고 영양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국민들은 야자나무를 신이 선물한 나무라고 해 함부로 자르지도 못하게 한다. 야외 라운지에 유럽인 여럿이 넓은 바다가 시원해서 인지 여기 저기 자리를 하고 있다. 회갈색 머리에다 검은 선글라스를 한 중년의 유럽인 남녀가 태양의 뜨거움을 식히려는 듯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는 것이 곧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 다정해 보였다.

갈레는 항구도시다. 1588년에 포르투갈이 이곳을 점령했으나 그로부터 50년 후인 1640년에 네덜란드에 넘겨졌다. 이곳은 16C 유럽인들이 건설한 요새로는 가장 훌륭한 유물이다. 또한 갈레는 동서교역 중심지로 약 1000년 전 아라비아인들의 교역지다. 네덜란드인들이 갈레를 점령한 후 14개의 석조 망루를 만들고 거리 전체를 성벽으로 축성해 스리랑카 최대의 성체를 건설한다. 성벽은 바다로 오는 적의 방어와 원주민들과의 분리된 생활, 태풍과 해일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 때 구획 정리된 도로가 현재까지 그 대로 보전되어 있고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바다와 접한 해안선에 두텁게 쌓인 육중한 돌 성곽이 버티고 있다. 2004년에 스리랑카를 휩쓴 쓰나미 피해가 이곳에는 없었던 것은 이 성곽 때문이었다. 성곽위엔 바다를 향한 공격용 대포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1796년 영국이 점령하고 있을 당시 뉴게이트라는 성문을 만들고 곳곳에 용수로를 만들어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치는 기념탑이 대국의 위상을 말해 주고 있다. 이곳은 유럽 국가들의 오랜 통치를 받아 왔기 때문에 유럽 문화와 정서가 많이 남아 있다. 마침 방문한 날이 영국과 스리랑카 간 크리켓 경기가 있어 성벽 위엔 영국 네덜란드 스리랑카 등의 깃발이 무수히 바람을 타고 있었고, 성곽위에 선 관중들의 함성이 뜨거운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작은 삼륜차 툭툭이가 성벽 밑에 줄을 지워 서 있었다.

7대 불가사의 스리랑카 왕궁 요새 ‘시기리야 (Sigiriya)’

현지어로 Sigiri(Lion사자>와 Ya (Rock 바위>라는 두 낱말이 합해졌다는 시기리야는 정글 속에 180m 우뚝 솟은 화강암 성채다. 이는 5세기에 건설된 요새왕궁으로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콜롬보에서 시기리야까지 170km, 버스로 5~6시간을 가야한다. 스리랑카는 고속도로가 없다. 그나마 시기리야로 가는 도로는 비록 2차선이지만 속도를 낼만한 도로가 중간 중간에 있다. 시기리야는 18세기 후반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영국의 건축학자 벨이 망원경으로 바위산을 관찰하다가 발견 했다 한다.

요새로 가는 중앙로 좌우에 물을 가뒀던 수조들이 여럿 있다. 어떤 수조는 왕과 궁중의 여인들이 물놀이 하던 수영장이었고, 어떤 수조는 370m 높이의 바위산 왕궁요새로 보내는 물을 저장하는 수조였다. 이 수조들은 우기에는 홍수를, 건기에는 가뭄을 조절하는 역할도 했다. 지금도 우기가 되면 곳곳에 뚫린 수로구멍으로 물이 분수처럼 뿜어 올라 장관을 이룬다.

5세기 스리랑카의 다투세나 왕자는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 여인은 왕족이 아닌 평민이었다. 왕자는 왕으로 즉위 하면서 다른 왕족의 여인과 결혼해야 했다. 왕족은 평민과의 결혼을 불허 했다. 그들은 사랑했기에 아이를 잉태했다. 다루세나 왕에겐 평민 여인이 낳은 맏아들 카샤파 왕자와 왕족 출신의 왕비가 낳은 둘째 아들 목랄라나 왕자가 있었다.

평민 어머니가 낳은 카샤파 왕자는 어머니의 출신 성분 때문에 앞날이 불안했고 왕족 혈통을 가진 이복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우려 했다. 카샤파 왕자는 왕이 되기 위해 아버지인 왕을 가두고 왕위를 찬탈한다. 이에 분노한 동생 목랄라나는 몇 명의 신하와 함께 인도로 망명 한다. 왕좌에 오른 카샤파왕은 후환이 두려워 부하를 시켜 부왕을 살해하고 만다.

아버지를 살해한 죄의식과 인도로 도망간 동생의 보복을 두려워하던 그는 해발 370m 깎아지른 바위산 꼭대기에 7년의 긴 세월을 들여 철통같은 요새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이것이 시기리야 궁전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1년 후 복수를 위해 세력을 키워 돌아 온 목랄라나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혼자 남게 되자 스스로 자결을 택한다. 이 궁전을 짓는데 걸린 기간은 7년, 입궁하여 꾸미는데 4년 도합 11년의 긴 세월을 공들였으나 그가 완성된 궁전에서 기거했던 기간은 고작 반년이었다. 과연 왕은 반년이라는 짧은 세월이라도 평안 했을까? 이렇듯 인간의 욕심이란 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것인가!

어마어마하게 큰 코끼리바위를 왼쪽으로 끼고 소름이 끼칠 것 같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 정상까지 계단은 1200개라 들었는데 이마에 땀을 훔치며 내려오는 중년의 서양인은 정확하게 1202계단이라고 말한다. 나선형 철제계단을 올랐다. 술취한 듯 현기증이 정상 오름을 방해 했다. 바위산 계단을 사이에 두고 발톱이 거대한 사자 발이 인간이 함부로 범접을 용서치 않는다는 기세다. 원래형태는 두 발 사이가 엎드린 사자의 입 이었다. 그러니 사람이 사자의 입으로 드나들었다. 시기리야라는 이름도 이곳 싱하(사자)기리야(목구멍)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계단을 또 올랐다. 거울벽면이 나왔다. 수백번 칠하고 그 위에 계란 흰자를 발라 연마해 거울을 만들었다. 멀리서도 사람의 왕래를 거울을 통해서 보았단다. 건너편 바위벽에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벽화가 나타났다. 우아! 이 높은 석벽에 곧 율동 할 것 만 같은 풍만한 앞가슴을 한 여인들이 멀리서 온 이방인에게 여인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벽화가 고미술학에서 유명한 ‘시길리아의 여인(Sigiriya Lady)’이다.

건강하고 풍만한 앞가슴을 내놓은 여성을 중심으로 화려한 장식과 의복을 입은 시녀들이 시중을 드는 모습의 그림들은 1500여년이 흐른 지금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본디 시기리야 암산에 500명의 여인 벽화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18명의 벽화만 남아 있다.

바위산 정상에 올랐다. 6ha 넓이에 왕궁과 저수지, 연회장, 정원, 그리고 넓은 수영장 등의 흔적이 역사의 얼굴로 다가 선다. 카샤파왕이 앉아서 무희들의 춤을 감상했다는 대리석 의자도 남아 있다. 의자 등받이 뒤로 물이 흘러가도록 만든 수로가 있어 왕의 더위를 식혀주었다고 한다. 시기리야가 세계 8대 불가사의가 된 가장 큰 이유는 그 화강암 바위 위에 건설한 궁전의 수로(물)시스템 때문이라고 한다.

시기리아 정상에서 본 일몰은 우주 캠퍼스에 그린 한 폭의 그림이었다. 황금으로 변한 하늘, 녹색의 정원, 그리고 신을 가까이 한 시기리야 록 정상, 현기증이 나게 힘들게 시기리야를 오르고….패허된 궁전이 허허롭다.

황혼이 내린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위대한 보석의 나라 스리랑카에 담긴 의미들을 생각한다. 감히 탐낼 수 없는 고귀한 남자를 사랑한 여자, 또 그의 아이를 가졌던 비천한 신분의 여자였기에 겪는 비극. 왕이 아닌 한사람의 남자를 사랑 한 것이 죄가 되어 아들은 어머니가 사랑한 아버지를 죽이고 또 자신은 동생의 복수로 자결하고 결국은 비극으로 끝난 한 왕가의 운명적 사랑은 부질없는 인간사 일까?

스리랑카=남기수 기자 titnews@chol.com